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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롬 9:1~18)복음을 전하는 연결고리(매일성경큐티, 로마서 9:1~18)

by 무지개소년 2023. 6. 12.

복음을 전하는 연결고리

매일성경큐티 230613 화
찬양: 사명
성경: 로마서 9:1~18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복음의연결고리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

 

'한참 멀었구나! 그것도 아주 한참'.

 

그래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거라 여겼는데, 바울의 3절 말씀을 읽자마자 어떤 면에서는 신앙적 좌절을 경험했다. 어떻게 성정이 같은 사람일진대,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얼마나 그 고통이 분명했던지 그의 양심조차 그 고통을 성령님과 함께 증언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는 안타까움을 넘어선 큰 아픔을 갖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큰 아픔이었을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의 안타까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을까?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봐도 없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부끄럽지만 목사 안수식에서 이 찬송을 부를 때조차도 나는 지금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갖지 못했다.

 

제주도로 마을선교 오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신자들을 위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복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적은 없었다. 단지 한 명의 불신자라도 전도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정도.

 

아직도 너무 부족하다. 오늘도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운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를 배운다.

 

사실 이 마음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가장 큰 정수()일 텐데, 이런 갈망 없이 계속해서 이론적인 해석과 어설픈 교훈을 얻으려고 애쓰고 수고했었다. 어쩌면 나의 지난날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위험한 불신앙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족하지만 우리모두 바울에게서 이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내 몸같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잠깐이나마 배우고 기도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 보자.

 

그렇다면 바울의 마음과 달리, 유대인들은 왜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으며, 왜 그를 믿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그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4~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양자 됨의 권세도 분명 알고 있었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예언)을 어릴 때부터 읽고, 보고, 때로는 귀찮을정도로 듣기도 했다.

 

그런데 왜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누구는 예수님을 믿어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누구는 멸망의 자녀들이 된 것일까?

 

이것에 대해 바울이 고민한 결과와 하나님께 받은 지혜는 6절 말씀이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다 똑같은 이스라엘이 아니란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빠짐없이 그 예언을 보고 들었지만, 그들 모두가 다 똑같은 이스라엘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 중 대다수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예언의 성취와 영광을 다 같이 찬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7~13절까지 유대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아브라함과 야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사실 창세기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7절 말씀과 같이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로 이스라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형은 에서였고, 동생은 야곱이었다. 형 에서가 육적인 장자였지만, 영적인 장자는 아니었다. 동생인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 이어 이스라엘을 이어나가는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떤 차별적 은혜가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니 아무리 봐도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분명하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데 '그럴 수 없느니라'. 차별은 없었다고 못을 박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누구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까?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렇게도 진심으로 괴로워했음에도, 누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누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자가 되었을까?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바울은 이를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시 15~18절까지의 말씀을 이야기한다.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일단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군가를 차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율법의 준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값없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공평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긍휼을 베풀어 누구나 구원의 길로 가도록 하셨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기록을 만나게 된다. 즉 일부러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오늘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그것은 정확히 맞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는 누가 봐도 착한 놈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악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애굽사람의 수를 뛰어넘자, 그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사랑스러운 아기들을 죽이는 극단적 정책을 펼친 장본인이다. 

 

결국 바로의 완악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그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여러 번 경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되돌이키는 결정을 하지 못했다.

 

롬 1:24(쉬운 성경)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죄악 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지각색의 더러운 죄를 지어 자기들끼리 부끄러운 짓을 행하여 을 더럽혔습니다.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바울이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한 부분일 뿐이다.

 

마태복음 5:7~8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비록 바울 같은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 모두가 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소망한다.

 

정말 우리 주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런데 우리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의한 자녀들로 살아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하나님은 그들이 아닌 우리를 먼저 선택된 백성으로 부르신 것일까? 그리고 정말 우리만 먼저 부르신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게 오늘의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다 약속된 말씀(복음)을 들었고, 누구에게나 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아직 미전도종족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의 이웃으로 국한 지을 때).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영의 자세가 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하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본래적으로 악하다. 바로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그 복음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구원받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었다. 참으로 복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여전히 바로의 길을 따라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여전히 이 땅에 심판은 오지 않았고, 또 기회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완악함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복음의 연결고리로 우리를 사명자 삼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굳게 믿었기 때문에, 고되고 힘들지만, 가끔은 주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만 오늘도 로마서를 심도 깊게 써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아직 완악한 자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같은, 아니 바울 같은 긍휼의 마음을 갖기 원한다. 주의 복음을 정말 애통하는 마음으로 전하기를 소망한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긍휼 하심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누구나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잊지 말자.

 

오늘도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연결고리(말씀과 삶으로)로, 주님의 사명자로 멋지고 당당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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