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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민 19:11~22) 나를 새롭게 하소서(매일성경큐티, 민수기 19:11~22)

by 무지개소년 2023. 4. 28.

나를 새롭게 하소서 (매일성경큐티 230428)

 

찬양: 예수 피를 힘입어(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성경: 민수기 19:11~22

 

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14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며
15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은 모두 부정하니라
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7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18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19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
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21 이는 그들의 영구한 율례니라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 자는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2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헤렘

 

1. 부정함의 전염성

부정함의 전염성이 대단하다.

 

단순히 시체를 만진 사람만 부정한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장막 안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안에 있었거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안에 들어간 사람, 심지어 그 장막 안에 뚜껑을 덮지 않은 그릇까지도 부정하다고 말한다.

 

사실상 사람이 죽은 그 장막 안의 공기와 접촉한 그 모든 것들이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음을 맞이한 뼈도 예외가 없다. 더 나아가 이제는 죽음의 의미가 퇴색되었을법한 무덤에 조금이라도 몸이 닿은 사람도 부정하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죽음과 마주한 모든 것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부정하다고 말할까? 바로 죽음은 조금이라 할지라도 심령의 부정함, 즉 또 다른 죽음을 묵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유품을 정리하는가? 그것도 굳이 왜 유품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유품을 정리할까?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죽음을 묵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코 낭만적일 수 없다. 죽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호상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남긴다.

 

죽음은 사람의 심령을 아프게 하고, 결국 그 죽음의 마주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내가 아무리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굳은 믿음을 가졌다 자부할지라도 피폐해지고, 결국은 살아있어도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헤렘'을 명령하신다. 혹자는 '헤렘'을 가지고 잔악무도한 하나님, 이율배반적인 하나님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헤렘을 명령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남겨진 잔재가 결국 그들의 올무가 되어 그들을 멸망당하게 만들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23: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결국 지나친 우상숭배와 인신제사,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안위와 유익을 구하던 가나안의 죽음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의 올무가 되었다. 사사기는 그것을 증언해 주는 책이다.

 

그 장막 안에 있던 뚜껑을 열어둔 그릇이 무슨 영향력이 있겠어? 그릇에 어떤 전염성이 있어? 그들은 비웃었지만, 결국 그 작은 그릇하나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부정해졌고, 사사시대의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죽음의 곡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부정함의 전염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어떤 믿음으로도....

 

 

2. 부정함의 전염성을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

 

그래서 부정함은 어떤 모양이라도 깨끗하게 씻어내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어느 정도까지 깨끗하게 할까? 완전히 끊어내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21~22 

이는 그들의 영구한 율례니라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 자는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아무리 깨끗하게 한 정결수라 할지라도 부정과 접촉하여 쓰이기 때문에, 그 정결수를 만진 사람조차도 다시 정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악순환의 연속적 개념 이해)이 끝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상징적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무슨 말일까? '절제'나 '관용'이 아니라 무조건 '헤렘'하라는 것이다.

 

부정한 것은 진멸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반드시 싹을 틔울 것이고, 어느새 쑥쑥 자라나 모든 것을 죽이는 부정함의 끝판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3, 20절의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결단코 끊어내지 못하면, 처음에는 단순히 성전에서 끊어질 뿐이지만, 마침내는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진다. 결국 그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과 인생 전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51:9~11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단순히 밧세바를 간음했기 때문에,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야라는 죽음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 정도에서 그칠 부정함이 아니었다.

 

그의 고백처럼 주 앞에서 쫓아낼 일을 당할만한 일이었고, 그 부정함은 성령을 거두기까지 할 정도의 위력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몇 날 며칠을 침상을 적시며 씻어내고, 또 씻어내고, 끊어내고, 또 끊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모든 심령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재창조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또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본다.

 

단순히 죽음과 마주한 것이 아니어도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다. 이 시대의 문화가 결국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조장한 죽음의 문화가 아니던가? 그 어디에도 생명을 그리고 용솟음치게 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을 사람들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래도 긍휼의 마음으로 그런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아예 거부한다. 

 

사실 우리는 삶 속에서 성령의 힘, 선한 양심으로 어느 정도의 부정함을 분별할 수 있다. 솔직해져 보라!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 부정한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다시 손을 대고, 다시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 정도의 부정함 정도는 손에 묻히고 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생명을 살리는 사명자로 살고 싶다면, 모든 부정한 것을 끊어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결국 이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는 것조차도 '헤렘'하지 못하면, 결국 내가 '헤렘' 당할 것을 우리는 오늘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렵다. 힘들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이 모르실까? 주님도 충분히 아시고,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아신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던가?

 

'상번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 번, 희생제사를 드려야 했다. 하루에 한 번이면 충분했을 것을 왜 하나님은 두 번이나 그들에게 드리라고 했던 것일까?

 

제사가 쉽던가? 하나님이 고약하고, 욕심이 많으셔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을 부정함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막고자 '상번제'를 드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끊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아침과 저녁에 아니, 삶의 모든 순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시간마다.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우리는 기도하고, 묵상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던 사도바울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되는 아침이다. 오늘도 너무 어렵지만 어둠이 가득 찬 세상 가운데 그 유혹에 굴하지 않고, 나의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힘을 힘입어 빛으로 하루를 살아내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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