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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민 20:1~13) 번아웃과 하나님의 배려(매일성경큐티, 민수기 20:1~13)

by 무지개소년 2023. 4. 29.

 

번아웃과 하나님의 배려 (매일성경큐티 230429)

 

찬양: 믿음과 삶
성경: 민수기 20:1~13

 

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번아웃

 

1. 번아웃

오늘 말씀을 읽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모세의 태도였다.

 

이전에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할 때에는 아무렇지 않게, 그래 모세도 사람인데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는 뭔가 심하게 이상했다. 뭔지 모를 이질감. 그것은 평상시 하나님이 알던 모세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세가 누구던가?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이 온유함을 보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난날의 모습을 보라.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님 앞에 엎드렸다. 오죽하면 성경을 읽던 내가 화가 났던 적이 더 많았으리라.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단순히 화가 났다고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하다.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며칠 전, 우리나라 프로파일러 1호 권일용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프로파일러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로 탁월한 형사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왜 그랬을까? 번아웃이 왔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계속 우울하고,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명퇴를 신청했다.

 

10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항상 하나님은 반역한 백성들에게 화가 나 진노하셨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 덕분에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사 백성들을 살려주셨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다. 하나님도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일, 그러니까 모세는 충분히 참고도 남는 일을.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그런 마음이 모세입장에서는 충분히 감사히 여겨졌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화가 나고,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모세와 아론의 번아웃.

 

사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는가? 

 

미디안광야에서부터 출애굽, 시내산, 광야 38년까지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여정이었다. 아무리 참아주고, 사랑을 해줘도 변할 줄 모르는 백성들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이제는 지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언제 번아웃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가?

 

이제 거의 끝나간다 싶을 때, 번아웃은 소리소문 없이 찾아온다.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게 다 귀찮다. 떠나고 싶다. 울고 싶다. 그냥 화가 난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가 없다. 끝없는 무기력증과 피해망상. 그게 바로 번아웃이다.

 

 

2. 하나님의 배려

 

오늘 사건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조명하면, 이 일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다니. 이 사건은 모두를 죽음으로 징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7~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너무나 분명하고 세세하게 지시를 해주셨다. 그리고 처음에 모세도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았다.

 

그런데 감정이 평상시와 다르게 조절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죽을죄를 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징계하셨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정면으로 가렸음에도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물론 평생 꿈꿔왔던, 오로지 이 일만을 위해 달려왔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엄청난 징계를 받는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받은 것이 정말 엄청난 징계이고, 심판이었을까? 

 

말씀을 다 읽고 깊이 묵상할 때에,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 끝없는 배려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에 걸려봤는가? 그 사람, 그 공동체, 그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일을 내려놓고 싶다. 

 

권일용 교수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범죄자 중에 정말 무서웠던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범죄자가 반가웠다고 한다. 수사하는 것에 보람이 있었고, 평생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자신의 천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번아웃에 그만 그 자리를 다 포기해야 했다. 더 이상 사건의 현장에 갈 수가 없었다. 아니 가기 싫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끝없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권일용 교수라고 왜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도 명예롭게 박수받으며, 퇴직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과감히 퇴직했다. 번아웃은 그런 것이다. 

 

모세와 아론에게 가나안은 정말 가고 싶은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마음과 상태로 그곳에 가면 그들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마음은 원이로되,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는 이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수많은 가나안의 적들과 살 떨리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이 과연 이 모든 것을 다시 할 힘과 마음이 있었을까?

 

오늘 누구보다 그들의 중심과 상태를 아셨던 하나님의 처방전은 기가 막혔다. 그들이 정말 번아웃으로 인하여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를 누가 봐도 공의로운 판정으로 납득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누구보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

 

오랜 시간 헌신하고, 고생한 하나님의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고,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어젯밤에 깊이 묵상할 때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것이기에 순종함으로 나눈다.

 

오늘날 번아웃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도 그런 상황에 직면해 봤다.그리고 번아웃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이 많다.

 

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 등의 정신적 질병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참 주변에 많더라. 

 

처음에는 위로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주변 사람들도 이내 떠난다. 아니 어떤 때에는 나를 비웃고, 왜 저럴까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의도적이든 아니든 따돌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고,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를 본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받아주실까? 부지 중에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 포기하기도 한다.  영적인 자존감도 그 어떤 때보다 바닥을 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화를 내고, 내 자신을 드러낸다. 분노하며 이를 간다. 그러니 뭔가 사람들이 이해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홀로 외로이 교회를 떠난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주님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그를 엄히 경고하시는 눈빛이었을까? 아니면 끝없는 관용으로 그를 안타까이 여기는 그를 너무나 아끼던 눈빛이었을까?

 

오늘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연약함 때문에, 번아웃 때문에, 무기력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곤 있지 않은가? 구제불능처럼 나를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이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믿음도 싫고, 삶도 싫고, 마음이 너무 지치고 어려운가?

 

주님은 끝까지 그 어떤 순간까지도 관용의 눈빛으로 우리를 아끼는 표정으로 바라보지 않으실까?

 

결코 나 혼자 괴로워 숨죽이며 울지 말자. 주님을 믿고 주님께 맡기자. 나의 번아웃도, 나의 정신적 아픔도, 나의 지치고 상함도, 주님께서 내 맘을 누구보다 잘 아시사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지혜로 우리를 반드시 위로해 주시리라 믿는다.

 

다른 것 묻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안아주실 그분, 손잡아주시고, 토닥여주시면서 위로해 주실 그분을 믿고, 힘든 우리의 마음을 털어내고, 다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함께 부르는 찬양, '믿음과 삶'의 가사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길 기도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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