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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왕상 2:13~25)기능적 순종이 아닌 인격적 순종(매일성경큐티, 열왕기상 2:13-25)

by 무지개소년 2023. 9. 6.

기능적 순종이 아닌 인격적 순종

매일성경큐티 230906 수
찬양: 나의 하나님
성경: 열왕기상 2:13~25
13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냐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14 또 이르되 내가 말씀드릴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이르되 말하라
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18 밧세바가 이르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왕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나의하나님
일러스트_은혜의그림묵상

 

15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잘 알고 있네"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맞다. 아도니야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았어야 했다.

 

자신의 야망을 무너뜨린 것은 다윗도, 나단선지자도, 브나야도 아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도전했다 얻어터졌던 지난날의 뼈아픈 교훈을 기억했야만 했다.

 

1: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그런데 왜 이리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다시 솔로몬에게, 아니 하나님에게 도전을 한다.

 

17 그가 이르되 청하건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그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근데 왜 하필 아도니야는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으려고 이렇게 노력할까?

 

솔로몬이 그 이유를 밝힌다.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그렇다. 그가 다윗의 후궁이었던 아비삭을 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백성들의 정서에서 다윗의 후궁을 얻는다는 것은, 왕위를 이어받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아도니야는 이 기세를 몰아 아비아달과 요압과 함께 다시 한번 세를 규합해 왕권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말이 좋아 머리를 쓴 것이지, 지금 아도니야가 꿈꾸고 있는 것은 엄연히 '하나님의 뜻'에 다시 반역하는 일을 꾸민 것이다.

 

결국 아도니야의 말로가 어떠했을까?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그렇다면 아도니야는 왜 끝까지 야심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욥기를 읽다가 크게 충격을 받았던 때가 있다.

 

바로 다음 구절 때문이었다.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렇다. 욥은 누가 봐도 당대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조차 그렇게 여기셨다. 

 

그런데 욥이 생각할 때에 자신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나?

 

그는 이전에 자신의 믿음을 '귀로 들었던 믿음'이라고 고백한다.

 

즉 '기능적인 복종'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섭리하심은 충분히 욥으로 하여금 '기능적 복종'을 하기에 충분했고, 큰 감흥(두려움과 경외심)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보니, 지금껏 하나님을 '기능적'으로는 '복종'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격적'으로는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욥이 '이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들음의 하나님은 '누구나의 하나님'이셨지만, 봄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나의 하나님'을 그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아갈까?

 

'기능적인 복종'일까? '인격적인 순종'일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이 단지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기능적인 복종'뿐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경우의 수에 근거하여, 아도니야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신하고,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을 '기능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삶의 순간순간, 정말 뜨겁고 깊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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