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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렘 17:1~18)"삶은 삶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매일성경큐티, 예레미야 17:1-18)

by 무지개소년 2023. 8. 8.

 

"삶은 삶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매일성경큐티 230809 수
찬양: 모든 상황속에서
성경: 예레미야 17:1~18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모든상황속에서
일러스트_햇살콩

 

얼마 전, 집에서 가까운 '다랑쉬 오름'을 오르게 되었다. 폭염때문인지 오름을 오르는 사람이 나 혼자 뿐이었다. 

 

"너무 잘됐다. 오름을 오르고 내려오는동안,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오로지 주님께 집중해보자"

 

요즘 나는 삶에서 주님을 계속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의 생각이 죄악됨을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의 멍때림이나 잡생각이 들 때면 여지없이 나의 생각이 너무나 '세속적인 욕망'과 '음란함'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게 되었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겉모습은 '마을선교사'이고, 주변에는 오로지 자연과 작은 마을 뿐이어서 오히려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질거라 생각했는데, 우리네 삶은 역시 그런게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한시도 주님을 계속 생각할 수 없을까?"

 

그날도 오전부터 계속 이 고민을 되내이고, 또 되내이다 답답한 마음에 오름에 간 것이었다. 마침 사람도 없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됐다.

 

그런데 왠걸, 오름을 오르다 풍경을 바라보다가 주님을 놓쳤다. 그리고 어김없이 또 다시 나만의 무릉도원을 그리며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 이후로도 계속 마찬가지였다. 

 

집중하다 딴 생각하다 집중하다 사로잡혔다.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인데, 보배로운 존재인데 이것밖에 안되다니. 어쩌면 '이마고데이'를 상실한 인간이 이토록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다 나만 그런 생각에 빠졌던 것이 아님이 생각났다.

 

'프랭크 루박', 그는 민다나오 섬의 '모로족' 선교사였다. 그리고 '모로족'은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이슬람교' 신자들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프랭크 루박' 선교사님은 그의 1930년 3월 23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늘 내 생각 속에 계시도록 매순간마다 주님을 돌이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도 너무 이 문제가 고민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성취하려는 이런 성찰과 노력을 어떤 이들은 비정상적이고 위험스러운 행동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위험을 무릅쓸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만일 우리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것이라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이것은 우리가 도달 할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말한다. "삶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오늘도 매순간 주님을 생각하게 하소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생각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소서".

 

그런데 정말 말씀대로 삶을 살고 있을까? 

 

만약 위의 고민이 허무맹랑함과 불가능한 도전처럼 여겨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수정해야만 한다.

 

"삶은 삶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아닌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사실 이 문제에서 야기된 것이다.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사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때에 속으로는 움찔 움찔 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주일날 설교말씀을 들을 때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마음에 찔림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이 정말 '삶'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완벽한 괴리, 아니 완벽한 분리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 안다. 사람을 믿으면 망한다는 것. 육신을 위한 일은 부질없는 것이며, 헛된 일이라는 것.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만이 복을 받는다는 것.

 

이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삶을 살아보니 달랐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의 고백을 솔직하게 해보자. 무엇인가?

 

"삶은 삶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나의 생각의 음란함, 부정함, 세속을 향한 욕망 등을 주님의 뜻과 생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모든 순간, 모든 상황, 주님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된다는 것 누구나 다 안다.

 

그럼에도 프랭크 루박과 내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매 순간 주님을 돌이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삶'이 진짜, 진심으로 변화받고 싶어서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정말 내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고민에 대한 해답에 접근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 너무나 고되고 괴로웠다. 핍박도 많이 받았고, 협박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뭐라고 고백하는가?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의 삶에서 이런 고백이 정녕 나온단 말인가?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오늘이라도 때리치고 나도 내 인생 살고 싶지 않았을까? 어차피 저주에 가까운 선포인데, 내가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

 

수십번을 고민했어야 마땅해보인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도, 그를 너무나 옥죄는 사명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것도 너무나 쉬워보이는 것은 큰 함정이다.

 

어떻게,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적어도 '세상'에 대한 생각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을 가득채우고, 지켰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되지 않는다. 계속 고민하고, 또 결단하고, 또 하나씩 내려놓고,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멍하니 있어도, 잡생각이 들어도, 부럽고, 하고 싶은 것이 보여도 여전히 주님의 뜻과 마음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 앞에서 심판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물가에 심어진 나무'(8절)가 되어 주님의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인생이 되리라 확신한다.

 

오늘이 그러한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오늘도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자. 그래서 부족하지만 우리가 선 자리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복된 인생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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