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 큐티(Q.T)

(렘 22:1~9)정말 '진리'라면(매일성경큐티, 예레미야 22:1-9)

by 무지개소년 2023. 8. 17.

 

정말 '진리'라면

매일성경큐티 230817 목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성경: 예레미야 22:1~9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5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
7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8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9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나님의진리

 

얼마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중용'에 관한 방송을 듣게 되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중용'은 어떤 책일까?

 

그날 방송했던 분의 설명에 따르면 '중용'은 불균형의 시대에 균형을 말하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불균형은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하늘과 나, 나와 세상, 다양한 인간 사이에서의 관계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단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물과의 관계 등을 일컫기도 한다.

 

결국 '중용'은 이 세상 모든 불균형을 어떻게 균형 있게 바꿀 것인가를 논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균형을 바꾸기 위해 '중용'에서 말하는 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실'과 '공경'이라고 말했다. 즉 항상 쉬지 않고, 군자가 '공경'을 위해 '성실'하면, 그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천하가 평안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feat. 퇴계 이황).

 

사실 나도 '중용'에 관해서는 이 날 처음 진지하게 들었던터라, '중용'이 어떤 책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날 내가 들었던 '중용'의 가르침은 생각보다 더 놀라웠다.

 

그리고 이어진 아나운서의 멘트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중용'의 가르침을 얼마나 우리의 생활 중에 '실천'하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방송을 위한 '일회성'멘트가 아니었다. 이후 이어진 전문가와 아나운서의 모든 대화는 어떻게 해서든 모든 사람들이 삶에서 '중용'의 가치를 실천하길 바라는 염원과 바람이었다.

 

다른 부분에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복음'과 비교하여, 세상의 '철학', '가르침', 특히 '타 종교적 가르침'은 그야말로 적은 것(?), 가끔은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데,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살아내 보자고 다짐하고 결단하는데, 또 독려하는데.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는, 그리고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그 중요한 가치를 위해 진심을 담아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말만 그럴싸하게 '하나님과 구원', '십자가와 복음'으로 꾸며놓고, 또 그것들보다 더 위대하고 진리라고 자부하면서도, 어쩌면 그들보다도 더 세상을 향한 '진심'이 퇴색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고민과 반성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셨다. 이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한 가장 핵심은 무엇일까?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삶에서 어떤 가치로 드러나고, 빛이 날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얼마나 '빛과 소금'된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

 

정말 몰라서 못하는 것일까?

 

누가 모르겠는가? 성경을 수박 겉핥기로 읽은 사람도 그 정도는 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만큼 오늘 우리네 삶에서 실천하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실천하지 않을까?

 

직설적으로 대답해 본다면, 이것을 정말 진짜 '진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중용'보다 '복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어쩌면 '복음'을 '중용'보다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지도 모른다.

 

말은 '십자가 사랑'보다 더 위대한 가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나의 마음은 '십자가 사랑'은 예수님에게서만 가능한 전설이라고 규정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님'이 내 삶의 전부이고, '복음'이 정말 나의 삶에 중요한 가치라면 어찌 그것을 이렇게 등한시하며 살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내 삶에 '복음'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살지 않는 것이다.

 

7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8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9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

 

오늘 그들이 그러했다. 남유다 왕 시드기야인지, 여호야김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전부로 여기지 않았고,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은 항상 그럴싸했다. '하나님'을 모신다고 성전을 지어놓고, '율법'이 최고라며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실제는 어떠했는가? 

 

곳곳에 '우상'의 '신당'이 넘실대지 않았던가? 중구난방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우상을 위한 '인신제사'가 춤을 추지 않았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아니라 결국 '나만을 위한 나라'의 건설을 위해 살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결국 '예수님'과 '복음',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를 우리 삶에 진리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을 삶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되묻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말 주님 앞에 진실되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주소서!", '예수님, 이 땅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그 나라 위해 내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위해 오늘도 진리를 좇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샬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