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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렘 4:19~31)애통한다는 것은(매일성경큐티, 예레미야 4:19-31)

by 무지개소년 2023. 7. 14.

애통한다는 것은

매일성경큐티 230714 금
찬양: 매일 스치는 사람들
성경: 예레미야 4:19~31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29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애통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주로 어떤 사람이 슬픔을 당하거나 어떤 사건의 참혹함, 안타까움을 보고 '애통'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그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의 의미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애통'이 단순히 그런 사전적 의미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에 그려진 앞으로 이스라엘이 당할 징계와 심판의 모습이 결코 가볍지 않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어떠한가?

 

적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이 속수무책이다. 그 땅의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마치 태초 때 창조가 일어나기도 전의 모습과 같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황폐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하는 중에도(29절), 어떻게든 적의 마음을 돌이켜보고자 창기처럼 화려하게 치장해 보기도 한다(30절).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명소리뿐이다(31절).

 

아직 이스라엘이 당면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습이 참혹하고,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럴까? 이 모습을 먼저 예언으로 알게 된 예레미야의 모습도 그러하다.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예레미야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괴롭고 아프던지, 19절에 나오는 '아프다'에 쓰인 '힐'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여인의 '해산의 고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예레미야의 '애통'하는 모습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예레미야의 '애통'하는 장면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가? 이것이 우리 이야기여도 그럴 수 있을까?

 

여기 한 범죄자가 있다. 그것도 흉악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이다. 갑자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정말 어렵지만 참회의 기회를 줬다.

 

그런데 그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정신을 전혀 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라인을 다 끌어온다. 국회의원에게도 전화하고, 심지어 용역들을 동원해 피해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용서 구하는 것만 빼고, 자신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어떠한가? 얼마나 괘씸하고 짜증 나는지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 정의가 구현되었다. 법원은 그에게 참혹한 형벌을 선고했고, 그는 평생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쌤통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맞아도 싸다',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지금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이 하나님에게,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았을까?

 

왜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예레미야의 '애통'은 이 세상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우리가 아직 예레미야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이스라엘은 맞아도, 벌 받아도 싸다. 아니 더 무너지고, 황폐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슬프게, 너무도 괴로워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예레미야는 이렇게까지 '애통'할 수 있었을까?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괘씸하게 생각하셨었다. 그러니 그들을 진멸하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조차 그들을 끝까지 진멸하지는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러실까?

 

그들을 정말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잘못해서 고통당하지만, 아니 멸망당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고, 아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예수님의 '애통'이 그러하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아 저 사람은 저런 대가를 치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고것 참 잘됐다', '아! 너무 공명정대하다'라고 말할 때에도, 그리스도인 된 우리만큼은 적어도 그 판단과 판결에 마냥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의 영혼을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영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죽음으로 달음박질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 '영혼', 구원으로 가는 길을 몰라 허덕이는 그 '영혼',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그 영혼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긍휼 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의 심판과 형벌을 정말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애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오늘 나를 향해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를 쏟아붓는 그들을 향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보.........(너무 어렵고, 힘들기에 언젠가는 주 안에서 예레미야야처럼 그들을 향해서도 '애통'하게 되기를 기도해 본다).

 

왜 그럴까?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것의 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아니 우리가 받았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영혼을 다시 한번 사랑하고, 다시 한번 용서해 줄 수 있는, 진심으로 '애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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