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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롬 4:1~12)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매일성경큐티, 로마서 4:1~12)

by 무지개소년 2023. 6. 2.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

매일성경큐티 230602 금
찬양: 내 삶은 주의 것
성경: 로마서 4:1~12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겸손한믿음과순종
이미지출처_미루나무그림묵상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잘했다거나(공로) 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할 만한 어떤 '행위'를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헌신), 오로지 예수님의 속량함의 은혜를 믿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정통성을 주장할 때마다 반드시 이야기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어, 그들이 사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보기를 원했다.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사실 이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은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토라에 정통한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5:6 아브람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창세기 15:6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그런데 그 당시 그는 어떤 상태였을까?

 

맞다. 그는 그 당시 '무할례자',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은 시점은 이미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이후인 창세기 17장 때였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로 유대인들의 주장하는 대로 할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라는 의식이 굳이 필요 없었을 터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라는 의식을 거행케 하셨던 것일까?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는 단지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육체적 표식(인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1절의 표와 인침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길 권한다).

 

바울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증명한다.

 

유대인 중에 그 누가 다윗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까?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유대인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치명적인 죄도 있었다.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으며,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유대인들의 주장대로라면, 다윗은 그가 지은 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정말 그러했을까? 다윗이 시편에서 스스로 뭐라고 고백하는가? 

 

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누구보다 자신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고, 그의 죄는 가려지는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그의 치명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 때문에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위 구절과 같이 그의 믿음(죄사함에 대한)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바울이 말한 로마서의 내용을 모르는 성도가 있을까?

 

아마 우리 중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이러니한 것이 우리는 항상 믿음을 말하며 행위를 논한다. 또한 공적을 따진다. 즉 훌륭한 믿음을 얼마나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가로 말하지 않고,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오직 그가 하는 신앙적 행위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이 무색할 만큼 예수님을 믿는 것에, 삶 속에서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을 어떤 구속이나 압박으로 여기며 오히려 힘들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불만과 불평이 터진다. 너무나 간절히 드렸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더디거나 없을 때, 우리가 그간 열심을 내었던 헌신이나 봉사, 우리의 행위와 공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협박하거나 타협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마침내 신앙의 파업을 선언하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이제 제대로 된 믿음을 갖기를 소망한다. 믿음은 오로지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속량함의 은혜를 믿는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

 

1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무엇이 정말 믿음인지 분별하고, 그 믿음에 따라서 보다 더 분명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 믿음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진짜 믿음이 무엇이고, 우리가 진정 좇아야 할 믿음이 어떤 것인지 이렇게 권면한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런 믿음의 순종만이 행해지기를, 우리 교회 현장에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더 인정받고, 헌신자로 세워지길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샬롬!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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