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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18:21~35)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매일성경큐티, 마18)

by 무지개소년 2023. 3. 9.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매일성경큐티 230309)

 
찬양: 예수 피를 힘입어(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성경: 마 18:21~35
 

쉬운성경 version.

21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2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는 왕에 빗댈 수 있다.
24 왕이 셈을 시작할 때에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불려 왔다.
25 그 종은 왕에게 돈을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인은 종에게 아내와 자녀들과 가진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다.
26 종은 주인의 무릎 아래 엎드려 빌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갚겠습니다.'
27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기고, 풀어 주며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나에게 빌린 돈을 어서 갚아라!'
29 동료는 그 종의 무릎 아래 엎드려 빌었다. '기다려 주게. 내가 모든 것을 갚겠네.'
30 그러나 그 종은 들어 주지 않았다. 가서 동료를 감옥에 넣고,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동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빌기에 내가 네 모든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33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에 넣고,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게 하였다.
35 이와 같이 너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
김용태작가_그림

 

1. 용서란.

성경은 흩어져있는 책이 아니다. 즉, 단편적인 이야기의 집합체가 아니란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마태복음도 마찬가지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단지, 창세기부터 이어 온 하나님 나라의 단 하나의 진리,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 공고히 할 뿐이다.
 
결국 오늘 큐티를 이해하려면, 어제 큐티를 우리는 정확히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잃어버린 양을 찾는 기쁨)을 정말 진정으로 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잃어버린 한 영혼 혹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한 영혼을 어떻게든 찾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전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 때에, 어제 큐티는 뭐라 하는가? 몇 차례 전하였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즉, 나는 전하였으니 그의 심판을 그의 몫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나는 전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말씀에 아주 큰 함정이 있다. 그것은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정확히 깨닫고 있는가?이다.
 
즉,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전하는데 저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자책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마음을 정확히 안다면 포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용서'라는 개념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나는 처음에 기쁜 마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도 결국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가 커져서 저 사람은 상종 못할 사람이 된다.
 
어떤 때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먹거나 손가락질을 당하며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맞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 모욕과 치욕, 강단에서 울면서 예수님께 책임지라고 토로했던 적이 있다.

그만큼 복음 전함에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다시 찾아오는 길은 결코 쉽지 않고, 때로는 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서이다. 그렇다면 용서가 처음 여기서 등장한 개념인가? 아니다. 구약의 레위기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거룩이 무엇이던가? 바로 사랑, 또 다른 말로 용서였다. 즉, 성경은 끊임없이 용서를 가르친다. 아니 창세기 때도 수없이 가르쳤던 것이 용서였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사랑은 그를 품어주고, 기도해 주고,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의 영혼이 구원함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나와 함께 살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해 주라는 것은 그의 영혼을 포기하지 말고, 사랑함으로 주님께로 되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교회 안에서도 사랑은 어려웠다. 심지어 주님께 목숨을 건다는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끝없는 속임과 성냄이 있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하면서도, 속으로는 간교하고, 미워하며 원망했었다.
 
내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던가?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이 내게 얼마나 큰지, 그가 베풀어준 긍휼 하심이 얼마나 처절한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사랑과 용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먼저 자신이 주님의 긍휼 하심으로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했던 용서와 사랑은 무엇이던가? 이론에 따른 보상적 사랑과 용서였다.

즉, 주님을 믿으면 그 정도 일을 해야 하고, 그 정도 일을 해야 나도 주님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겠다는 기브 앤 테이크, 그리스도인의 양심적 행위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너무 적나라한가? 너무 날 선 비판인가? 그러나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나부터.
 
얼마나 연약한지 모른다.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다. 안아주시고, 다시 못 이긴 척 길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가장 큰 십자가의 사랑을 내게 값없이 주신 분이시다.
 
이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다른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 이론적이지 않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기를 끝없이 갈구하게 된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 25절은 사실 이 진정한 사랑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가깝다. 
 

"이와 같이 너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실 것이다."

 
경고가 무엇인가? 결코 말을 듣지 않는 자,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하는 것이 경고다. 즉, 처음부터 우리는 이 말씀에 집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즉시 집중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그 사랑을 받은 자라면, 오늘 나도 그 사랑으로 형제의 모진 말과 일관된 태도, 복음을 받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을 다시금 용서하고, 그를 십자가 사랑으로 끝없이 주님께로 인도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용서이다. 오늘도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해 전인격적(온 맘 다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그 부분을 먼저 이 사순절에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도 여호와닛시! 갓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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