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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6:1~16) 내게 있는 향유옥합 (매일성경큐티, 마26)

by 무지개소년 2023. 3. 31.

 

내게 있는 향유옥합 (매일성경큐티 230331)


찬양: 내게 있는 향유 옥합 / 찬송가 288장
성경: 마 26:1~16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향유옥합

 

1. 제자들의 믿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 중에 '나는 스스로 믿음 없다' 여기는 범인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 3년간의 동고동락으로 그들의 어깨에는 은근한 뽕이 들어가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몇 차례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니, 그런가 보다 생각은 했음에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의 모습은 이렇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은 장황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항상 교회의 테두리에는 있었고, 나름대로의 직분은 가졌지만, 어떤 때에는 종교지도자 행색을 한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면에는 믿음의 첫 단추 조차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이 외부에 보여지는 잔잔한 파동만 일어도 금세 마음이 폭주해 버린다. 
 
말은 항상 그럴싸해보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말의 중심에는 '믿음'이 없었다. 마치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그날처럼......
 

2. 여인의 믿음

왜 여인은 하필 향유를 부었을까? 정말 제자들의 말처럼 차라리 그 돈을 예수님 앞에 헌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향유는 그 당시 굉장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당시 화폐기준으로 약 300 데나리온, 그 당시 노동자의 1년 품삯이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연봉을 깨뜨려 발에 부은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의 눈이 뒤집힐 만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이었다.
 
그 당시 향유를 붓는 것이 아주 특별한 관습은 아니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손님의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 냄새를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완전 FLEX!!).
 
또 직분 세울 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을 부어 흘러내리게 했다. 또, 장례 때 시신의 급격한 부패를 막기 위해서 향유를 바르기도 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 직후에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향유 부음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말씀하신다.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좋은 일인가?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그렇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함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가치,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 무엇이라도 주님께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귀하다. 그 무엇보다 귀하다.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귀하게 그 향유는 사용되었다.
 
고귀하고도, 순결한 우리 주님의 십자가 그 길을 위해서, 그 십자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의 고결한 믿음의 순종으로.
 

3. 우리의 십자가 고백과 순종.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아까운 거 '십일조'는 왜 하는 거야? 
 
그렇다. 이 십일조를 두고도 교인들조차 논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세전 십일조냐? 세후 십일조냐? 이미 마음이 글러먹었다.
 
모두 다 주님의 것이거늘, 세전, 세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던가? 그만큼 누가 보기에도 허비처럼 보이고, 아까워 보인다.
 
왜 시간 버려 헌신하고, 예배드리러 가냐? 사순절 특새 꼭 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 사역자들이 제일 먼저 깡깡거리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나는 자유하던가? 이미 마음이 글러먹었다. 모든 시간이 주님의 시간이거늘.

주님께 내 몸 바쳐, 내 마음 다해 사랑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그만큼 누가보기에도 허비처럼 보이고, 아까워 보인다.

 
재물이 아까워보이고, 시간이 아까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믿음은 장황한 말이나 그럴싸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순종의 제사로 보여지는 것이다. 제사가 무엇이던가? 구약의 제단을 쌓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야곱이 돌제단을 쌓은 것. 이제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의미이다. 이제 후로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겠다는 의미이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아니라, 순종의 제사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았다면, 예수님을 위해 나를 드리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이 여인은 단순히 향유를 부은 것이 아니다. 그녀를 주님께 바친 것이었다. 
 
오늘 그럴싸하게 믿음 있다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럴싸하게 조금 헌금하고, 드러내기 바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말 내 몸 다해, 내 마음 다해, 주님께 은밀한 순종과 헌신을 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여전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시선, 민란이 일어날까 두렵다는 생각뿐이었다. 믿음이 가장 추악해지는 순간은 바로 남을 의식하는 순간이다. 
 
오직 주님이 아신다면, 오직 주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아낌없이 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으리라.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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