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십자가 사명! (매일성경큐티 230404)
찬양: 십자가 그 사랑
성경: 마 27:1~10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1. 불법의 한가운데 서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고, 고문당하고, 또한 재판당하실 때까지 그야말로 불법의 한가운데 서 계셨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 당시 규정상 당일에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 굳이 새벽부터 열릴 필요가 없었다. 새벽에 열리나, 밤에 열리나 그다음 날이 돼서야 판결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벽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법이고, 도덕이고, 양심이고,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라는 마음뿐이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그들의 조급함과 불법을 '새벽에'라는 말로 모두 표현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의 불법은 끝나지 않는다. 그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사형의 권한이 있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다. 묘한 압박감과 함께.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만 계셨을까?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얼마나 몸은 아프고 마음은 찢어졌을까? 얼마나 억울하고, 이 모든 것이 어이가 없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불법의 현장에서 오로지 '십자가 사명'만을 생각하셨다. 그리고 힘들고, 어렵고, 아프고, 슬프지만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신다. 마치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야만 할 '사명'의 길인 것 마냥....
이럴 때면 나는 손양원 목사님이 옥중에서 쓰셨다는 찬송시가 생각난다. 찬송가 541장의 가사이기도한데, '꽃이 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이 있음인가 열매 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가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여름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변함없네.'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목사, 그러나 거부한 목사.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목사. 그는 항변할 수 있었으리라. 투쟁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 불법의 현장에 서서 오로지 '주의 사랑'만, '주의 구원'만, '십자가 사명'만을 외쳤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불법의 현장에 서서, 아니 억울한 그 현장에 서서, 그리스도인을 망각한채 그들보다 더 현란하고 핏대선 얼굴로 따지고 있지 않던가? 어떻게 해서든 그 불법을 밝혀내겠다고 사돈에 팔촌까지 아는 교인들을 총동원하고 있지는 않던가?
목사든, 장로든, 성도든.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불법의 현장에 서서 '오직 예수', '십자가 사명'을 외치지 못한다면 바로 우리가 '새벽에' 그 곳에 서있던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2. 진정한 회개의 의미.
사탄에게 눈이 멀었던 가룟 유다가 비로소 눈이 뜨였다. 그런데 사실 한쪽만 눈이 뜨였던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가 오늘 한 최악의 선택, '자살'이 그 모든 것을 증명한다.
사탄은 그의 한쪽 눈만 열어줬다. 그가 잘못한 것만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그가 충분히 괴로워할 시간을 주었다. 또한 그가 잘못한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신나게 비웃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모두를 멸망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생각한다. 이용가치가 사라진 물건도 끝까지 파멸시키는 사탄의 지독한 계략.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제라도 믿었어야 했다. 그분이라면,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 고난을 이기실 수도 있을 텐데. 왜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시는가? 고민했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에 그들에게 해주신 말들이 이제라도 바로 떠올라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사탄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이제라도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사탄의 '계략'에서 벗어나, 어렵지만 결박당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꿇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하는 것이 있다. '후회'이다. 후회가 무엇이던가? 그 순간에만 잠깐 하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회개'를 끝까지 강조한다.
누구나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그에게 들려지지 않고서는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잘못 앞에서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십자가'와 '복음'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마지막 선택을 '죽음'이 아닌 '사명'으로 전환할 용기를 얻게 된다. 그래야만 '후회'가 아닌 '회개'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더 많이 하고 있는가? '후회'일까? 아니면 '회개'일까?
지금 사순절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겠는가? 여전히 불법의 현장, 욕망의 현장, 후회의 현장이 아니라, 다시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다시 복음의 현장에 나를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남겨진 인생, 이! 제! 라! 도! '십자가 사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 갓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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