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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5:14~30) 그래서 너는? (매일성경큐티, 마25)

by 무지개소년 2023. 3. 29.

그래서 너는? (매일성경큐티 230329)


찬양: 내가 주인삼은
성경: 마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무익한종

 

'무익한 종'의 실체.

'무익한 종'은 과연 그 스스로도 '무익한 종'이 되고 싶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엇 때문에 결국 '무익한 종'이 되었을까?

 

어려서부터 수없이 접했던 이야기다. 교회 생활하면서 달란트 비유보다 많이 들어 본 이야기가 또 있을까? 보통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 헌신과 사명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되는 본문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주인을 향한 그 헌신과 봉사는 정말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는 것일까? 그 뜻을 우리는 제대로 깨닫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그 사명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즉, 이것이 오늘 우리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자, 헌신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 지금,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전도'와 '선교'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헌신과 봉사를 해야 하는가? 왜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야 하는가? 왜 우리는 다음세대를 키워야 하는가? 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오늘도 주님께 드려야 하는가? 등등......

 

다른 이유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함이고, 그로 인해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며, 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일을 정말 잘 감당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저는 이런 사역을 감당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헌신을 감당하고 있어요. 참 귀하다. 너무 귀하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 본문은 조금 더 확장해가길 원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전도'와 '선교'의 현장은 어디인가? 교회인가?

 

아니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니 주일까지. 교회 밖, 세상에서 사는 '삶'이 바로 진짜 헌신과 봉사를 해야 하는 사명지이다. 선교지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무익한 종'이 실제적으로 감이 오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삶의 현장에서 '무익한 종'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점점 더 '무익한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종'은 변명한다. 주인이 어떤 분인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두려워했던 것일까? 정말 잘 알았을까?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그 일을 받았을 때, 하기 싫은 이유를 찾았던 것이었다. 

 

그 종의 중심을 주인은 정확히 통찰한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는 이 일이 맡겨졌을때, 하기 싫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리라. 어찌 됐든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대충 뻐기고 싶었다. 그래서 주인이 이 정도 되면 이해해 주겠거니 생각하면서 땅에 달란트를 묻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었다. 그는 결코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정말 주인을 어떤 분인지 알고, 두려워했었다면 그가 어떻게 했겠는가?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종들과 같이 나가서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주인이 어떤 분인지도 잘 몰랐고, 주인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대로 하고, 자신이 생각할 때 그럴싸한 이유만 만들고 자신을 위해 놀았던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하나님을 잘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세상의 일에 나의 모든 시간과 능력과 재산과 은사를 쏟아붓는다.

 

그리고 조용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을 땅에 묻고 감춘다. 빛의 자녀라는 타이틀을 위기의 상황에서 묻는다. 소금 된 사명을 세상의 질서 앞에서, 돈의 위력 앞에서 조용히 땅에 묻는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웃고 떠들고, 즐기고, 마시고 논다.

 

그리고 마치 내게 주어진 일은 없는 것마냥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주인은 마침내 온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날이 되면 도래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싸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주일'이다. 저는 주의 일에 헌신했는데요. 저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에, 주의 나라를 위해 교회에서 이렇게 봉사하고, 사역했는데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그 중심을 꿰뚫고 말씀하신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각, 삶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변화'이다.

 

정말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정말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나도 그랬다. 목사로써 주일 설교를 하면서, 새벽설교를 준비하면서, 수없이 쏟아지는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 정도 되면 주님 앞에서 정말 나의 직분을 잘 감당한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에게 설교할 때면 눈물이 났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운 일이 태반이다. 기도하고, 소리치고, 손을 들고 찬양하면서 도취되었다. 아 이 기분.... 황홀한 은혜이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내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오늘도 만나는 그 사람,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에서는 거룩, 삶에서는 내 삶.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이 정도 교회에 헌신했으니, 나도 밖에서는 숨좀 쉬자고, 카페도 다니고, 공원도 찾아가고, TV도 보고. 쉬는 것도 사역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삶이 안식이어야 하고, 삶이 사명이어야 한다. 삶이 진정한 우리의 사역과 헌신의 장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만 주인이 두렵다 말했지, 정말 주인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만 주인이 누구신지 안다고 생각했지, 정말 주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주일'을 보냈고, '남은 일주일'을 나의 장으로 만들었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세상 사람과 나는 지금까지는 같은 '무익한 종'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주님은 더 호되게 혼내신다. 우린 세상사람들보다 더 나쁜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다. 

 

이제는 정말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오늘 당신은 주님을 진정 두려워하는가? 오늘 당신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아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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