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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4:36~51) 이보다 쉬운, 그러나 이보다 어려운 (매일성경큐티, 마24)

by 무지개소년 2023. 3. 27.

 

이보다 쉬운, 그러나 이 보다 어려운 (매일성경큐티 230327)


찬양: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성경: 마 24:36~51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발자취

 

1. 이 보다 쉬울 수 없다.

오늘 말씀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예수님이 찢으셨다!'

 

나도 어린(?) 사람이지만,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TV에 나와서 '찢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실, 그 표현을 연예인들이 사용할 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그 표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오늘 말씀이야말로 옳은 사용법이 되리라.

 

이 보다 더 쉽고, 이 보다 더 명확하고, 이 보다 더 호소력 있는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한 마디로 '찢었다'라는 표현이 맞다. 그 누구도 이보다 더 마지막 날에 대해서 정확히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결단코 없다.

 

오늘 예수님은 총 5개의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핵심이 무엇인가?

 

"깨어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나 이런 경고(?) 혹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

 

멸망당하고, 버려지고, 다 털리고, 처벌당하여 이를 갈며 울게 된다.

 

2. 정말 아무도 모를까?

내가 좋아하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님의 명언이 한 때는 '정직한 믿음은 정직한 의심에서 나온다'라고 쓰였었는데, 요즘에는 한결 부드러운 표현인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으로 바뀌었다.

 

어찌됐든 '무조건 믿으라',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은 기형적인 믿음을 양산한다는 뜻이다. 말씀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는 그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여 '살아내라'고 주신 것이지, 덮어두고 믿으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사설이 길었다. 오늘 말씀을 읽고 나서 두 번째 들었던 생각이 있다. "정말 그때를 아무도 모를까?"

 

그리고나서 바로 요셉이 떠올랐다. 이어서 다니엘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영적인 민감성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온 노아도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혜로, 기도로 미래의 일을 너무나 세세히 이미 알려주셨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날을 깨어서 준비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큐티를 하다가 '아차' 싶었다. 그렇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하나님께서 분명 정확히 알려주셨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 '시기', 그 '때'를 알려주신 적은 없었다. 요셉에게는 그 시기까지도 명확하게 알려주신 줄 알았다. 그러나 창세기 41장을 읽을 때에, 요셉에게도 그 시기를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단지 요셉이 바로에게 인장을 받은 이후, 그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할 때에, 이미 풍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 이 보다 어려울 수는 없다.

앞으로 되어질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때를 모른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오늘 예수님이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리라.

 

어찌 보면 굉장히 쉽다. 그러나 노아가 준비에 소요한 시간, 120년을 안다면, 적어도 그 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리라.

 

도둑이 오는 것을 알면 털리지 않는다는 그 찰떡같은 비유. 

 

가장 마음에 와닿던 비유는 두 사람이 밭에 있고, 두 사람이 맷돌을 돌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진다는 그 이야기.

 

너무 어렵다. 아니 너무 무서웠다.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른다. 아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당장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세상 사는 것을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노아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 보인다. 정말 나의 몸과 마음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때에 한 줄기 소망이 떠오른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가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어떻게 하면 깨어 준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다.

 

노아에게 방주 만드는 법을 친절히 알려주셨던 것처럼, 요셉에게 그 꿈 해몽을 자세히 알려주신 것처럼, 다니엘에게 말씀으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이란 그 어떤 방법보다 훌륭한 '교과서'를 주셨다.

 

물론, 아직도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한결 마음은 편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딱, 한 가지만 주의하면 된다.

 

'내가 내 몸의 주인', '내가 내 생각의 주인',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 얼마든지 주님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충분히 깨어있을 수 있으리라.

 

이보다 더 쉬운,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것 같은 하나님의 나라.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쉽지 않겠지만, 순간순간 예수님 바라보며 멋지게 이기고, 내가 선 자리에서 세워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갓블유~~~~!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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