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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3:1~12) 예수님처럼? 예수님 되어! (매일성경큐티, 마23)

by 무지개소년 2023. 3. 22.

예수님처럼? 예수님 되어! (매일성경큐티 230322)


찬양: 똑바로 보고 싶어요
성경: 마 23:1~12
 

쉬운성경 version.

1 그 때,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3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한다. 그래서 말씀 상자를 크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이들은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7 이들은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선생님은 오직 한 분이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9 그리고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데, 하늘에 계시다.
10 너희는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11 너희 가운데 큰 자는, 너희의 종이 될 것이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

 

1. 예수님의 사이다 발언!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바리새파와의 논쟁을 모두 마치신 후, 말씀을 정리해 주신다. 그런데 그 하시는 말씀이 모두 주옥같고, 사이다 발언이다.

 

문제는 그 사이다 발언이 과연 누구를 향하는가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한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인사받는 것을 좋아하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과연 누구를 향한 사이다 발언인가?

 

사실 이 말씀을 처음 묵상할 때에, 이 말씀은 성도님들을 향한 말씀이기보다는, 이 시대 목회자들과 중직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그리고 더 깊이 묵상할 때에, 과연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결국 오늘 말씀은 바로 '나', 아니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사이다 발언임을 느낀다.

 

'위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중인격', '페르소나'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없이 목격했다. 수없이 욕했다. 그리고 수없이 욕하면서도 따라 했다.

 

그러면서 이유를 만들었다. 교회 생활 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정말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위선'의 정확한 뜻이다.

 

당연히 성도들은 덕이 있어야 하고, 목회자는 본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집에서처럼 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인격이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집에서처럼 옷 입거나, 먹거나, 자녀에게 행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은 '위선'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선'은 정확히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만', 이름이 많이 '불리려고만', 그리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만' 하는 것이 위선이다.

 

사실 세상살이에서도 '위선'이나 '가면'을 써서는 안된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이 바로 작은 예수가 되어 이 땅을 살아가고, 그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고 전해야 하는 사명자이기 때문이다.

 

2.  낮아져야 한다. 섬겨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여야 '위선'이 아닌 '겸손'과 '진실'이 되는지, 어떻게 하여야 '위선자'가 아닌 '작은 예수'가 되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지 말씀하신다.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너희 가운데 큰 자는, 너희의 종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매일 연신 부끄럽다. TV에서 전땡땡 목사를 볼 때에 부끄럽고, 저기 강동구의 김삼땡 목사를 볼 때에 부끄럽고, CBS, CTS 등의 방송에 나오는 땡땡땡 목사들을 볼 때에 부끄럽다.

 

누가 과연 진짜일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도의 모습이 저 모습이 맞을까? 권사님 이리 와봐! 집사님 내 말 좀 들어봐! 그렇다니까....

 

불신자에게 복음 증거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역시 '십자가'가 아니었다. 걸림돌은 언제나 '목사님'들과 '직분자'일 경우가 100%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이 자신 없을 때가 많다. 예수님 얘기 꺼내면,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교회와 목사, 성도들을 갖고 치고 들어온다.

 

그런데 나는 자신할 수 있는가? 없다. 전혀 없다. 나도 욕망적이고, 세속적이고, 탈을 참 많이도 가진 사람이다. 누구보다 추악하고, 누구보다 솔직하지 못하다. 

 

이 큐티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날그날, 조회수와 공감수를 안 보는 것이 가능한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것은 더 나은 큐티를 위함인가? 아니면 읽는 자의 편의와 이해를 위한 몸부림인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누구나 '위선'과 '진실' 사이에서 끝없이 줄다리기하고 싸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위선'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고, 모든 이들에게 덕과 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끝없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에게 맞춰가려고 말씀을 지키고, 율법적으로 내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다.

 

"내가 무슨 예수님이야. 어림없는 소리". 수없이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해 봤다. 그런데 결국 나약하게 무너진다.

 

그런데 순간순간 스스로 예수님이 되어 살아가고, 모든 것을 예수님이 되어 분별하려고 하니 낮아질 수 있었다.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었다.

 

분명 실패할 때도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도 더러 있었다. 난 만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우리 아니던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은 끝까지 몸소 보여주셨다. 낮아지고, 겸손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섬기고, 견뎌야 하는지 보여주셨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성찬을 받는다.

 

세례가 무엇이던가? 세례는 이제는 내가 '내 모습'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식 같은 말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겠습니다' 선포하는 것이 세례다.

 

그리고 매번 성찬을 받아 누리며, '그래, 다시 한번 예수로 잘 살아보자', '나는 연약하니, 주님의 몸과 피로 덧입혀주세요' 재다짐하고, 재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잘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모든 것은 '카르페디엠' 아니던가? 순간을 예수로 즐기면 된다. 지금을 예수로 살면 된다.

 

그러면 점점 더 하나가 된다. 점점 예수님에게 내 몸과 마음이 합쳐진다. 맞춰진다. 그러면 어느 순간, '위선'을 떨지 않아도 '겸손'할 수 있음을, '위선자'로 살지 않아도 '진실'할 수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순간임을 감격스럽게 누리게 된다. 자꾸 부족하다. 연약하다. 하지 말자.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나만 생각하자.

 

"오늘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 이거 하나면 충분하리라 믿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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