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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7:45~56) 십자가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삶 (매일성경큐티, 마27)

by 무지개소년 2023. 4. 7.

십자가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삶 (매일성경큐티 230407)


찬양: 무엇이 변치 않아
성경: 마 27:45~5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십자가

 

내 몸을 쳐 복종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하신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절망적인 원망이 아니었다.

 

사실 이 절규의 원본은 다윗의 시편 22편이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현실과 상황 앞에서 주님께 절규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얼마나 고통이 극에 있던지, 신음소리조차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그에게 따랐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그러한 고통이 수반되었으리라.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그 고통과 신음(무려 20cm나 되는 대못으로 인한 출혈과 쇼크의 반복) 중에도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욥의 아내는 큰 절망과 고통 가운데,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욥이 인간으로서 더 이상 그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기 어렵고 힘들어졌을 때, 욥은 부르짖는다. 절규한다. 마치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의 원망과 절규였다는 것이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 절규했느냐에 따라, 그것은 철저한 원망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될 수도 있다.

 

오늘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절규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원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육신으로 드리는 마지막 간절한 중보 기도다. 또한 자신을 주께 맡기는 거룩한 기도였다.

 

누가복음 23:34, 4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끝자락에 와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이 십자가 고통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못한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십자가형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고통에 참예할 수 있겠는가?

 

사순절, 성금요일,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더욱 결단하는 것이 성금요일,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삶이다. 

 

어찌 그 걸음과 그 길에 고통이 없겠는가?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한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어쩔 때는 핍박도 당하리라. 가끔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순간도 찾아오리라.

 

손해 봐야 한다. 피해당해야 한다. 그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굴욕과 자존심을 바닥에 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묵묵히 그것을 감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고, 사도바울이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제 내 차례다. 아니 우리 모두의 차례다. 한국교회와 세계열방의 차례다.

 

오늘 성금요일, 멋들어진 기획을 통한 예배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드리는 깊은 회개와 반성, 새로운 결단과 적용이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이 아침에 중보 해본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 기억하며, 우리도 십자가를 살아내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 내일(8일, 토)은 큐티를 부득이 올리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아들 다니엘의 치과 진료로 육지에 나갑니다. 오고 가는 비행이 안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가는 길마다 준비된 영혼과 만남이 있을 수 있도록, 은혜 넘치는 여정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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