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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왕상 15:25~32)예수님을 힘입어(매일성경큐티, 열왕기상 15:25-32)

by 무지개소년 2023. 10. 13.

예수님을 힘입어

매일성경큐티 231013 금
찬양: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유튜브 찬양링크)
성경: 열왕기상 15:25~32
25 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26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27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28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29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31 나답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2 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예수님을힘입어
출처_이화하하말씀묵상그림일기2

 

14:10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11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그가 그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어쩌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심판이 이리도 빠른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여로보암의 아들이었던 나답 본인도 그랬던 것 같다.

 

그가 14장의 이 경고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위험의 징조가 있었다.

 

14:17 여로보암의 아내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그 아이가 죽은지라

 

그의 형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다. 그리고 슬퍼할 새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 여로보암이 죽었다.

 

14:16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 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이제 나답은 누구보다 아버지 여로보암과 그의 집안이 왜 이런 심판을 겪어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아니 긴가민가했던 사실이 현실이 되자,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집에 임한 심판이 하나님의 분명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그렇다. 아버지 여로보암은 자신도 범죄 했지만, 온 이스라엘을 범죄 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의 집안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그도 분명하게 깨달았으리라.

 

그랬다면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다.

 

'변화'. 지금이라도 주께 돌이키는 것.

 

아버지 여로보암의 죄를 사죄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날을 오직 여호와를 위해 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집과 자신에게 남겨진 일이라는 것을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깨달아야 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선택을 했던가?

 

26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그는 오히려 엇나가는 길이었다. 마치 어차피 망할 인생, 신나게 내 맘대로 하다가 죽자라고 생각한 듯 보인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금세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주일마다 보고, 듣고, 또 하루하루 이리도 큐티를 했기에 우리의 일상의 모습은 달라졌을까?

 

우리 중 누구도 죄를 지으며 살기를 원하는 이는 없다. 결코 죽음으로 치닫는 그 길을 누가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도, 여전히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 그리스도의 '정의'와 '공의'를 뛰어넘는 일이 다반사다.

 

왜 그럴까?

 

우리 스스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루하루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살아가야 한다.

 

난 개인적으로 '성찬'을 기독교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그것도 매우 중요한 예식으로 여긴다. 아마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그렇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성찬 때만 되면, 모두가 한 마음이나 된 것처럼 후딱 해치우는 분위기가 된다.

 

또한 정말 내가 거쳐온 교회들만 그런지 몰라도, 단 한 번도 성찬의 의미를 몸소 깊이 깨닫게, 아주 작은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성찬 전에 상기시켜 주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앵무새처럼 정해진 멘트만 주구장창 하는 것을 봐왔다. 정말 교회들에게 있어 '성찬'이 중요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성찬'이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나 혼자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예수님 힘을 힘입어' 내가 살아가겠노라고,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 앞에서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식이다.

 

그렇기에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대충 시늉만 해서도 안된다.

 

항상 '성찬'을 행할 때마다 목회자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손의 모양하나, 잔을 마시는 모습 하나하나를 정확히 가르쳐주고, 행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 한다고 몇 분이 더 소요되겠는가? 

 

결국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세상에 나와서 우리는 나 혼자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나답은 그렇게 살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실 강요당한 것이다.

 

나답 자신은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의 집에 임한 심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얼마든지 스스로도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죄'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망가지겠다고 '죄'의 길을 간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스스로의 힘을 더 과신했기 때문에 그는 '죄'의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 스스로는 오늘을 살 수 없는지 깨닫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힘입어' 살아가고자 하는 기도와 고백과 결단이 없이는 우리 또한 나답의 길을 내가 걷기 싫어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옛 사막의 교부들은 '예수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이다.

 

그들은 왜 그런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일까? 

 

스스로가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고는, 임박한 심판의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죄'가 나중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치달으면서도 계속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 순간 '예수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도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고 있을까?

 

부디 '예수님을 힘입어'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아침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힘입어'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밤이 되기를 기도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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