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 큐티(Q.T)

(왕상 22:41~53)코람데오(매일성경큐티)

by 무지개소년 2023. 10. 31.

코람데오

매일성경큐티 231031 화
찬양: 하나님 앞에서 (유튜브 찬양링크)
성경: 열왕기상 22:41-53
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코람데오
일러스트_백배열매

 

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그렇다. 여호사밧은 오늘날로 치면 '평화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의 평화주의자 면모는 이미 어제 본문에서도 언급됐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는 자신의 왕의 위치를 인지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아합의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덕분에 그는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었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오늘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도움을 단칼에 거절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왜 그랬을까?

 

오늘 본문 43절은 여호사밧의 인생의 걸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렇다. 그는 평화주의자 적인 성격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했고, 그 가운데 아직도 산당을 없애는 과감한 결단은 내리지는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약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같은 성격과 성정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전과 다르게 아하시야의 도움을 거절한 것과 같이, 그는 아버지 아사 때에 없애지 못했던 '남창'을 과감히 없애는 개혁을 단행한다. 

 

비록 더디지만, 비록 늦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다.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성격이란,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란 결국 자신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

 

오늘 여호사밧 같은 경우에는 그가 생각할 때에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나라의 왕으로서, 사람됨의 입장에서 올바르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우상 섬김이나 삶의 자리를 인정해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왕으로써 양보할 수 있는 평화의 미덕이라고 그는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런 생각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렇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코람데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신념으로 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 바뀔 수 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큐티를 쓰면서 항상 우를 범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있다. 내 생각, 내 주장,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의를 버리는 것이다.

 

가끔은 나의 신념으로 큐티의 방향이 정해질 때가 있다. 결코 옳지 않다. 결코 올바르지 않다.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큐티의 내용이 올바른가 항상 묻고, 점검해야 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굉장히 하나님 앞에서 무례하고, 욕망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것이 신앙이나 믿음을 지키겠다는 발언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리는 그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고,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을 지닌 자가 되어야 한다.

 

즉 자라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자라는 자가 되어야지, 나의 경험과 인생의 연륜으로 자라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어떤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고, 주장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점검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성격, 내 신념,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점검하고, 올바로 바로 잡는 겸손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로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있을 때 온전히 살 수 있고, 변할 수 있다. 샬롬!

 

* 어제 공지한대로 11/1~21일까지 다니엘 기도회에 참여합니다. 이 기간동안에는 개인묵상으로 진행됩니다. 모두 11/22일에 다시 만나요! 제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