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 큐티(Q.T)

(욥기 19:1~29)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라(매일성경큐티 욥 19장)

by 무지개소년 2023. 11. 24.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라

매일성경큐티 231124 금
찬양: 나의 가는 길 (유튜브 찬양링크)
성경: 욥기 19:1~29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주를바라보라
일러스트_노주나

 

 

빌닷의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저주에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래도 한때는 누구보다 신뢰하는 친구 사이였을 텐데.....

 

사실 이 이야기는 욥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나간 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아픔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자비하심이 있기를 소망한다. 샬롬!

 

18장에서 빌닷은 욥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인이기 때문에, 악인이기 때문에, 그 악인을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저주한다.

 

하지만 욥은 19장 6~12절에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악인이기 때문에 나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까닭 없이도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시고, 그물로 덮으셨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를 인지했으면 좋겠다.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당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주신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때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 앞에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저 주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형편이 안됨에도 주의 사역을 열심히 하려고 애썼는데, 부족하지만 그동안 나의 물질과 시간을 주를 위해 사용했는데.... 왜 이런 고난이 내게 찾아온 것이지?

 

지금 욥은 그러한 토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그리고 그 모습이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쥐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그렇지 아니한가? 어디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방도가 없다. 정말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에게 당한 고난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이유 없는 고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나를 떠나간다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오히려 비난한다면 어떨까?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한 구절, 한구절 읽는 동안 욥의 그 아픔과 절규가 눈에 선하다. 나의 형제들, 나를 아는 모든 이들, 친척, 심지어 내 집의 종들조차, 아니 나의 아내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고난은 꼭 이렇게 한 뭉터기가 되어 나를 괴롭혀야만 하는 것일까?

 

욥은 지금 현재 자신이 처한 상태를 이렇게 정의한다.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그렇기에 그는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한다.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자, 이쯤 되면 욥이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처럼 여겨진다. 철저한 고립과 소외 속에서 욥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욥의 선택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것 같고, 아니 오히려 하나님에게 까닭 없는 고통과 고난을 받는 그 시간 중에, 그리고 그로 인해 주변에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떠나가고, 원망하는 그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욥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이해할 수 없게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구했다는 것이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을 까닭 없이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던가! 이것은 다른 말로 어떤 면에서는 원망 섞인 말이다.

 

그로 인해 사방의 사람들조차 다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욥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너무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지 않은가?

 

솔직히 처음에는 욥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 과거의 나의 행적이 이 말에 대한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넘지 못할 산을 넘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조차, 나의 어머니조차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결국 내가 지금 살기 위해 매달릴 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그분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 나만의 고백이 아닐 것이다. 

 

고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나고? 원망하고, 부르짖다가도 결국 다시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매달릴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고백, 이중적인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가?

 

시편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렇다. 그 고난 중에도 주를 다시 바라볼 때에 주께서 그 길은 나에게 주는 고난이 아니라,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시험임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 고난조차도 나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욥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의 입에서 어떠한 고백이 나올 것인지 이미 보았다.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정말 대단한 고백이 아닌가!

 

당장 내게 주어진 고난으로 인해서 힘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바라보기를 고난 중에도 멈춰서는 안 된다.

 

원망할 수 있다. 낙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시 눈을 들어 주를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그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는 놀라운 은혜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번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그 시험을 통과할 때에 주님께서 반드시 일하심을 그들이 경험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성경의 많은 선조들이 이것을 이미 증언하였다. 다윗이 고백하지 않던가! 요셉이 고백하지 않던가! 사도바울도 고백하지 않던가!

 

오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에 직면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아니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 사는 게 그렇다.

 

실망이 된다. 왜 내 모습만 이 모양이냐고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다시 한번 주를 신뢰함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러면 이 고난이 내게 주는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반드시 주의 일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 더 크게 느끼고, 깨닫는 은혜가 있으리라 믿는다. 샬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