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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마태복음 21:1~11) 별처럼 빛나는 사람 (매일성경큐티, 마21)

by 무지개소년 2023. 3. 14.

별처럼 빛나는 사람 (매일성경큐티 230314)

 
찬양: 행복(화려하지 않아도)
성경: 마 21:1~11
 

쉬운성경 version.

1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다가,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두 명의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당나귀 한 마리가 새끼와 함께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당나귀를 풀어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이 필요하시답니다'라고 하여라. 그러면 즉시 내어 줄 것이다."
4 이것은 예언자가 말한 것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5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겸손하여 당나귀를 탔는데, 어린 당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6 두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7 그들은 당나귀와 그 새끼를 데리고 와서, 그 등에 자기들의 옷을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8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옷을 벗어 길에 깔았고, 나뭇가지를 잘라 똑같이 했습니다.
9 예수님의 앞뒤에서 따라가던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복되도다!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는 흥분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11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예언자입니다."

 

다니엘

 

1. 화려하지 않은 입성의 비하인드 STORY.

매번 설교를 들어도 궁금한 것 투성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어린이', '스스로 큐티법'이 중요한 것이다. 본문을 읽고 궁금한 것이 많다면, 반드시 이번에는 말씀을 읽고 스스로 깊이 있는 묵상을 하기를 권한다. 결코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 주님의 선택은 '나귀새끼'였을까? 이왕이면 백마 탄 왕자가 좋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주님이 필요하시답니다", 우리가 보통 읽는 개역개정 성경으로 "주가 쓰시겠다"말하라고 하신다. 이 말인즉,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화려하고 훌륭한 큰 말도,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특등급의 괜찮아 보이는 나귀 정도는 충분히 타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그런 플렉스, 그런 스웩은 하셔도 충분한 분이시다. 그런데 주님이 선택한 것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귀 새끼였다. 왜? 도대체 왜?
 
그 동네엔 훌륭한 말이나 다른 동물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고르신 것은 오로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스스로 구약에 예언된 우리의 왕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스가랴 9:9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의아하고 진귀한 장면이 나온다. 
 
사실,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는 어느 정도의 '뽀대'가 필수다. 왜 사람들은 화려한 것에 열광하는가? 왜 사람들은 좋은 집, 좋은 차를 선호하는가? 그만큼 보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보이는 것만큼 내가 평가받고, 대접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새끼 나귀에 앉아계신다. 음.... 이 얼마나 모냥 빠지는 모습이란 말인가? 그것도 제자들의 겉옷이 대충 덮인 새끼 나귀. 아마 겉옷이 더 커서 질질 끌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람들이 연호한다. "다윗의 아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복되도다", "높은 곳에서 호산나".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일 큐티 본문 21:14~16절 말씀이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과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치는 아이들'은 누구인가? 물론 예수님께 나아왔던 어린아이들(천국에 대한 언급 등)도 포함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이 그동안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던 수 많은 사람들, 맹인과 앉은뱅이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과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대다수 속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2. 겉모습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였다.
 
만약 그 자리에 대제사장이 앉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대제사장은 애초에 나귀새끼 따위는 정말 타지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 때처럼 사람들이 저렇게 진심으로 연호하였을까?
 
결코 아니다. 소리를 지른다해도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한 행동이나 아부였을 뿐이리라.
 
중요한 것은 나귀새끼에 탄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려한 겉모습과 인기에 빠진 나머지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잃기 시작한다.
 
학교 다닐때 인기 있는 선생님도 있었고, 인기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교회에서 인기 있는 형도 있고, 누나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목사님도 있었고, 인기 있는 장로님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에 크게 남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려함에 속았던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기억에 인상 깊이 남아있는 선생님은 수수하시고, 조용하셨지만 말 한마디에 따뜻함이 묻어있던 분이셨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비질을 하시던 장로님, 설교할 때 말투는 조금 어눌하셨지만 묵묵히 골방에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 목사님, 설교 강단에서 진실되이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 오히려 내 가슴에 깊이 남아 존경심이 들게 한다.
 
예수님이 환호를 받았던 것은(나중에는 지도자들의 속임을 당해 반대가 되었지만) 겉모습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환호를 받았던 것은 그분이 '예수님' 되셨기 때문이었다.
 
외제차를 타고, 대형 세단을 타야만 체면이 서는 것일까? 교회 가장 좋은 곳에 집무실을 두고, 부목사들이 빠릿빠릿 움직여야만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일까? 말 한마디면 교회가 술렁술렁해야 훌륭한 장로가 되는 것일까? 주변에 사람이 항상 많고, 항상 부족함 없이 쓰고 입고 먹어야 이 시대의 성공한 사람일까?
 
결국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끝이다. 새끼 나귀를 타도, 자전거를 타도, 좋은 원단의 옷을 입지 않아도 드러날 것은 결국 다 드러난다. 그 사람의 정체가 온 천하에 명명백백히 드러난다. 우리 예수님처럼.
 
만들어진 환호성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연호로.
 

 3.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의 표준이 되신다. 
 
화려한 겉모습과 뛰어난 언변을 위해 노력하며 살 것이 아니라,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된다. 그것이 곧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정체성 훈련이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지만, 아니 충분한 능력이 되셨지만, 그가 하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었다. 마태복음 전체가 그렇다. 예언과 성취의 관점으로 마태복음을 읽어보았는가? 얼마나 놀라운 고귀한 순종이 그 가운데 있었는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가장 위대한 장면, 십자가도 그렇게 탄생하지 않았던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에수님조차 두려움이 있으셨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신다.
 
왜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하셨을까? 그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셨다. 그 이름의 뜻을 묵상해 보라.
 
오늘 우리가 화려함과 겉모습, 인기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이 땅에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정체성을 주님 앞에서 점검해봐야 한다. '소명'과 '사명'을 되짚어봐야 한다.
 
그러면 집중해야 할 것이 바뀌게 된다. 돈을 좇고, 욕망을 쫓고, 좋은 집과 차에 나의 모든 관점을 쏟지 않게 된다. 물론 주님이 채워주시면 좋은 차와 좋은 집에 살 수도 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데 거부하지 마라.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나의 모든 육신과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열정을 쏟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은 곧 '소명'과 사명'에 직결된다. 부르심이 명확한 사람은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말씀'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그를 주님은 의외의 장소로 인도하신다. 또한 진귀한 체험의 자리로 안내하신다. 
 
마태복음 23:12절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다니엘 12:3절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의 밝은 처럼 날 것이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은 영원히 처럼 날 것이다."
 
겉모습에 집중하기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집중하며 살아가보자. 그리고 그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나의 '소명'과 '사명'은 무엇인가? 점검해 보라. 그러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높아지려는 '인기'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좇게 될 것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 말씀에 기꺼이 아낌없이 순종하라.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알아보리라.
 
"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은 누구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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