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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요한복음 8:12) 빛으로 오신 예수님, 빛의 교회의 시작 (오늘 큐티)

by 무지개소년 2023. 3. 13.

 

빛으로 오신 예수님, 빛의 교회의 시작 (오늘 큐티 230313)

 
찬양: 빛으로 오신 예수여(어두운 세상에)
성경: 요 8:12 / 요 12:35~36
 

쉬운성경 version.

요 8:12 그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생활하지 않을 것이며, 생명의 을 얻을 것이다."

요 12: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빛이 잠시만 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있을 때에 다니면 너희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 이 너희에게 있을 동안 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숨으셨습니다.

 

빛의교회
아이들이_만든_교회간판

 

1. 큐티 본문이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한 변명.

큐티란 무엇일까? 큐티의 사전적 정의? 사실 큰 의미가 없다. 큐티가 오늘의 나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큐티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시간이다. 이 세상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니 어떠한가? 부족하다. 연약하다. 참 못나도 이렇게 못날 줄이야.
 
그제야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된다. 부족하고, 연약한 내가 오늘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어렵지만,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볼 테니 나에게 새 힘과 용기를 더하여주시옵소서.
 
내가 두려워서 갈 수 없는 그 길에 주님 나와 함께 하여주시고, 주님이 나의 앞에서 먼저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바로 큐티시간이다.
 
그러므로 큐티시간은 결코 관념적인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나의 삶에 실재적()인 변화를 갈망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커리큘럼을 따라 큐티를 하다 보면, 가끔 관념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과감히 어떤 날에는 커리큘럼을 집어던져야 한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주님은 요 며칠, 사순절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나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라고 계속해서 강권하셨다. 아주 정말 강하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께 되물었다. 예수님! 십자가면 어떻고, 빛이면 어떻습니까? 같은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내게 주신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죄의 고백에 집중하기보다, 지금은 소망의 예수님을 부르짖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과감히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마태복음을 잠시 내려놓고,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해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
 

2. 빛으로 오신 예수님.

왜 주님은 나에게 사순절의 십자가가 아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묵상하라고 강권하셨을까?
 
기나긴 묵상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 
 
요8:12 "나는 세상의 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생활하지 않을 것이며, 생명의 을 얻을 것이다."
 
요 12:35~36 "빛이 잠시만 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있을 때에 다니면 너희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 이 너희에게 있을 동안 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의 아들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돈 그 자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혼돈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는 듯하다. 왜 그럴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어느새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졌다. 북한의 굶주린 이들의 아우성보다 미사일 발사소식에 귀를 더 기울인다. 튀르키예 대지진은 잠깐의 동정심을 유발했으나, 오늘 나의 일상의 즐거움보다 못하다. 가해자가 큰 소리를 치고, 피해자가 눈치를 보며, 작은 소리도 못 내는 현실을 보면서도 연일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누구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오늘 그렇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우리 자신이 혼돈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가 혼돈이 아니라, 바로 내가 혼돈과 어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35절을 깊이 묵상해 보자. 왜 우리가 세상의 혼돈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혼돈 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 치는가? 지금 우리가 매달리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나만을 위한 세상을 향한 집착, 돈과 욕망을 쫓는 선택이 정상적인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세상의 혼돈을 구별 짓고, 나의 혼돈과 공허함을 씻을 수 있는 길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깊이 묵상하고, 간절히 모셔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이 세상의 혼돈을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방법이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예수님을 모르는 동네에 와서, 가족과 함께 밤마다 예배할 때에 우리의 바램은 소박했다.  단 한 영혼이라도 예수님을 전할 때에 그가 영접하여 주를 고백하게 하소서. 불신자 한 사람만 전도해도 내 평생에 목사로서 여한이 없겠다 여겼는데, 주님은 우리 가족에게 더 큰 비전과 소망을 품으라고 요청하신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 어두운 동네에 전하여라', 그래서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가족들과 상의하여 앞으로 우리 마을에 지을 교회의 이름을 정했다.
 
'빛의 교회', 그러고 보니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 의미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빛의 벙커'가 우리 마을 앞에 있다. '빛의 교회', '빛의 벙커' 라임 보소!
 
한 번은 동네 어르신에게 왜 이 마을은 굿과 제를 많이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 마을은 굿과 제를 2~3달에 한번 다 같이 모여한다. 그것도 아주 대대적으로 한다.
 
어르신에게 돌아온 대답은 아주 의외였다.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혼돈에서 오는 것이다. 찢기고 상한 마음, 평안과 기쁨을 느껴본 지 오래된 마음에서 오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무엇이든지 소망이 될만한 것에 기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방향을 알지 못하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껏 늘 그랬듯이 함께 모여 제를 드리고, 굿을 했다는 것이다. 잠깐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이야말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하시기에 너무나 좋은 시간이다. 
 
무질서의 혼돈과 공허함 속에, 주님은 '빛'을 선포하셨다. 그러자 그곳에 어두움이 사라지고, 빛이 비추이기 시작했다. 죽음의 구렁텅이가 지워지고, 생명의 역사가 움트기 시작했다. 절망과 외로움의 노래가 그치고, 기쁨의 새로운 찬양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이제 이곳 수산리는 '빛의 교회'를 통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선포될 것이고,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외로운 이들에게 새로운 응원이 시작될 것이다. 그들의 닫힌 마음과 찢긴 심령이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솟아날 일을 기대한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오늘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나는 오늘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당신의 삶이 예수님을 다시 모실 때에 당신의 공허하고, 외롭고, 지치고, 상하고, 찢긴 그 심령이 다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갓블유!
 
우리 함께 일어나 함께 가자! 하나님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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