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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민 15:22~41) 십자가의 흔적(매일성경큐티, 민수기 15:22~41)

by 무지개소년 2023. 4. 19.

십자가의 흔적(매일성경큐티 230419)

 

찬양: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성경: 민수기 15:22~41

 

22 너희가 그릇 범죄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23 곧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명령한 날 이후부터 너희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24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25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니 이는 그가 부지중에 범죄함이며 또 부지중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헌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
2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도 사함을 받을 것은 온 백성이 부지중에 범죄하였음이니라
27 만일 한 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하면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28 제사장은 그 부지중에 범죄한 사람이 부지중에 여호와 앞에 범한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29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든지 누구든 부지중에 범죄한 자에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이도종목사순교비
제주대정교회_이도종목사_순교비

 

'부지 중'과 '고의'의 경계에서

제주 대정교회 앞마당에 가면 위의 사진과 같이 이도종 목사님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폭도들에 의해 순교당하신 이도종 목사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도종 목사님은 순교 직전에 폭도들에게 기도 강요를 당하셨다. 자신(폭도)들이 이 싸움에서 이기게 기도를 해주면 살려주겠다는 조롱과 협박이었다.

 

이도종 목사님은 이에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라며 단호히 말씀하신다. 

 

그러자 폭도들은 이도종 목사님을 심하게 때린 후, 일제 때 파놓았던 1인 참호에 던져 넣고 생매장시킨다. 이도종 목사님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끝까지 찬송을 부르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소리 내어 기도했다고 한다.

 

정말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어떻게 그 두려움과 무서움의 상황과 공포심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나라면 어떠했을까? 죽음과 그 상황적 공포에 눌려 거짓으로라도 기도하지 않았을까.....

 

이도종 목사님의 유해가 1년이 지난 후 발견되었다. 생매장 당하는 그 순간에도 엎드린 채 하나님께 기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무엇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그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했을까?

 

우매한 내 머리로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그 두려움의 순간, 그 공포의 순간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흔적이 자신에게 남겨져 있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십자가의 흔적이 기억나고 생각될 때에,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두려움보다 주를 따르는, 즉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선택을 하게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갈라디아서 6: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을 읽던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38~40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하나님 앞에서 부지 중에 죄를 짓는 것과 고의로 짓는 죄는 어떻게 구별이 되었을까?

 

아마도 청색 끈이 달린 술을 보고도, 그 죄를 짓는다면 이것은 부지 중에 모르고 지은 죄, 실수로 지은 죄는 아니었을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분명하고, 일관되지 않는다 말한다. 애매모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명확하다.

 

그 청색 끈이 달린 술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그 죄에서 멈춰야 했다. 모든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하나님의 법을 떠올려야 했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인지 누구보다 분별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전부였을까? 어떤 관용도 없는, 어떤 자비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만약 그 죄를 짓는 것에서 멈추지 못했다면, 아니 청색술을 보았음에도 부지 중에 죄를 지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보며 깨닫게 된다.

 

'부지 중'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그것이 죄임을 깨닫지 못하는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시험과 유혹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어떻게든 믿는 우리를 무너뜨리려 세상 풍조를 따르게 유혹하고, 전략적으로 공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부지 중에 눈이 가릴 수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를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내가 주를 믿지 못함이 아니라, 내가 주를 믿는 마음은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노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도 있다는 것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아니던가! 

 

이런 경우, 후에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 밀려오는 극심한 후회와 아픔. 어떻게든 의를 사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든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은혜이다. 부지 중에 죄를 지은 자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용서의 기회를 제공해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을 면죄부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 스티그마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죄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망권세 이겼듯이 우리도 끝까지 사망권세 이기고, 죄에 대하여 죽는 자가 아니라, 의로 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가까이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의 가슴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의 흔적이 나의 가슴을 지배하고, 나의 생각을 이끌고 있는가?

 

세상의 풍조가 아닌, 그 그늘 아래에서 살기 위해 오늘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 혼자 있는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기억하고, 기념하지만, 세상에서는 나의 편의와 쾌락을 위하여 십자가의 법을 무시하고, 부지 중이라는 명목으로 죄를 짓고 있는가?

 

솔직히 오늘은 자유의지의 책임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가 사도바울처럼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중보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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