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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민 16:16~35) 끝까지 중보기도자!(매일성경큐티, 민수기 16:16~35)

by 무지개소년 2023. 4. 21.

끝까지 중보기도자! (매일성경큐티 230421)

 

찬양: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 민수기 16:16~35

 

16 이에 모세가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되
17 너희는 제각기 향로를 들고 그 위에 향을 얹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오십 개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
18 그들이 제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얹고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회막 문에 서니라
19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20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1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4 회중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방에서 떠나라 하라
25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따랐더라
26 모세가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27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방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들의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
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29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같고 그들이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벌과 같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거니와
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31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34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35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고라

 

여호와께서.

민수기를 계속 묵상할수록 모세의 믿음이 재발견됨을 느낀다. 이토록 모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을까?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을 내가 정확히 잘 몰랐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모세의 '하나님의 사람됨'을 나타내고 있을까?

 

오늘 성경을 읽으며 특별히 들어온 구절들이 있다. "여호와 앞으로", "여호와께로부터',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뜨였던 "여호와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한 때,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목사님들의 은퇴 전후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너무 놀랍다. 

 

지금 그는 누가 봐도 화가 나는 상황이다. 되지도 않은 말로 사람을 열받게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침착하다. 천천히 방법을 일러주고, 상황을 예의주시할 뿐이다.

 

절대 노발대발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 앞에 엎드릴 뿐이었다.

 

이것은 19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충분히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놔둘 수 있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그는 너무 분하고, 억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느 정도 동조하는 눈빛을 건네던 그들까지도 품고, 걱정하며 중보기도하는 위대함을 보인다.

 

그는 왜 그리도 침착하고, 온유하고, 겸손했을까? 그는 어떻게 저리도 마음이 넓을까? 어떻게 화와 분노를 저렇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모세는 모든 권위와 힘, 능력과 권세가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인정했고, 또한 삶으로 고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 모세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처럼 모세가 백성을 중보 하는 부분들을 볼 때에, 사실 마음속으로 분노하며 '저 나쁜'을 연발하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직분과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정확히 알았다. 또한 이 모든 일의 심판자가 하나님이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입장에서 충분한 숫자였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대단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말만 그렇게 하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얼마든지 노하시거나 혹은 강력한 어조로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유다를 향하여 관용의 눈빛과 말과 행동을 보이신다. 사랑을 베푸셨다.

 

사실 아는 바와 같이 몇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심판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힘과 권위와 능력의 원천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모든 비난과 조롱을 그치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은 '용서'와 '사랑', 끝까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한다. 또한 그 실천의 가장 최고봉은 누가 뭐라 해도 '중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하나같이 마지막에 공통된 기도를 한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모세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

"여호와께서" 마침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뒷담화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들의 영혼의 약함과 구원을 향하여 중보기도 할 수 있는 내가 되길, 우리가 되길.....

 

어떤 누구라도 '관용'을 끝까지 베풀 수 있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되길.... 소망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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