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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왕상 1:1~10)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매일성경큐티, 열왕기상 1:1-10)

by 무지개소년 2023. 8. 31.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

매일성경큐티 230901 금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성경: 열왕기상 1:1~10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5 그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기도
기도하는_가정이_되길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다윗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영웅 같은 존재이다.

 

어느 정도 인가 하면 이스라엘의 국기가 '다윗의 별'이며, 유대인을 상징하는 표식이 '다윗의 별', 즉 '다윗의 방패'라는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다윗'은 항상 흠모의 대상이자, 인생의 롤모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위대하고 흠모할만한 다윗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잘났고,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모든 세상권력을 다 가진 것 같고, 모든 사람이 흠모할만한 덕망을 겸비해도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 결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다. 즉 '스스로' 높아지려는 것만큼 어리석고, 우매한 짓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시던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은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며, 내 스스로는 무엇하나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전적으로 나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나의 유일한 주권자임을 만방에 선포하라는 것이다.

 

사무엘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그런데 살다 보면 이것이 쉽지 않다.

 

무엇 때문에 우린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 아닌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에 빠지게 될까?

 

성경은 '기도'를 쉬면 그러하다고 말씀한다.

 

기도가 무엇이던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의 뜻을 구하는 소통의 창구이다.

 

즉 우리 삶의 '호흡'과 같은 것이 바로 '기도'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쉬게 되면, 나의 삶이 '내 것'이 된다. 주님의 주권을 무시하게 되고,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운영하기에 이른다.

 

5 그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오늘 '아도니야'가 그러하지 않은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도니야의 행동 명령을 보라.

 

'스스로 높여서', '내가 왕이 되리라',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가? '자신'만을 위해 산다. '스스로' 높아지는 교만에 서있다.

 

왜 '아도니야'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초청하지 아니한 사람들, 그리고 초청했어도 가지 않았을 사람들의 명단에 그 답이 숨어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렇다. 그들은 누구보다 '주께 충성'하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단편적 이야기의 창고가 아니다.

 

아마 선지자 나단과 솔로몬은 기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일 후에 솔로몬은 왕이 되며, '일천번제'를 드릴 정도로 주님께 기도로 모든 일을 맡기던 사람이 아니던가!

 

또한 선지자 나단도 그러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었고, 언제나 예민하게 기도 중에 주님의 분명하고, 확실한 음성을 듣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브나야와 용사들'이 함께 써져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성경 구절은 없다. 

 

하지만 그가 다윗왕 때에도 그랬듯,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에 결정적 공을 세운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어려울 때마다 올바른 판단을 내렸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

 

사실 오늘 본문에 '기도'라는 말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 '기도'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의적'인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기도'에 초점 맞출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주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주님 앞에서 정말 '겸손한' 사람인지, 아니면 '교만한' 사람인지, 성경에 따른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도'를 말하고 싶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주 앞에서 겸손하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높이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처럼 '무리'를 지어 '세상'을 쫓고, '욕망'을 따르려 하지도 않는다.

 

오늘도 '기도'하는 자가 되어, 헛된 '세상'을 쫓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하루가 되길!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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