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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큐티(Q.T)

(왕상 21:1~10)바른 신앙(매일성경큐티)

by 무지개소년 2023. 10. 26.

바른 신앙

매일성경큐티 231026 목
찬양: 항해자 (유튜브 찬양링크)
성경: 열왕기상 21:1-10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5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바른신앙
이미지_디모데양육3권표지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누구에게나 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내 땅을 좋은 값에 팔 수 있다니, 내가 가진 것을 좋은 거래 조건에 넘긴다니, 아니 더 웃값을 치르고 넘길 수 있다면 큰 이득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파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돈에 돈을 더하고, 명예에 명예를 더하고, 권력에 권력을 더하여주어도, 아니 그 모든 것을 합하여 더하여 주어도 넘봐선 안된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나봇은 진짜 엄청난 사람이다. 얼마든지 핑곗거리도 있지 아니하던가!

 

왕인데~, 에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괜찮다는데, 뺏는 것도 아니고, 더 쳐준다는데 얼른 팔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과연 될까?

 

절대 되지 않는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경우가 왜 없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금한 일들이 있다. 아니 금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말씀하신 덕목들이 있다.

 

얼마든지 해야 할 분위기고, 그것을 해야 내가 살고, 우리 가족이 살고, 그리고 우리 교회가 사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일은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잠깐 눈 감으면 되는 일들이 있다. 잠깐 회개기도하고 끝내면 되는 일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해도 될까? 말아야 할까?

 

대부분 한다. 그리고 성령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따르지 못한 괴로움에 잠시는 괴로워하지만, 금세 또 잊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일에 대한 어떤 심판도 즉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 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가다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바닥에 붙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봇 같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우상과 신당이 만연했고, 남창과 귀신의 문화가 지배하던 그 세상에서 나봇같은 사람이 어찌 흔할 수 있었을까?

 

온통 하나님의 말씀이 옳음에도, 그것이 정의와 공의임에도, 그로 인한 심판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분위기, 왕과 왕비의 권력, 그 당시 성전의 제사장들도 다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나봇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렇게 했을까?

 

주의 말씀은 그런 것이다. 무슨 영광을 보고자, 무슨 대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잘 믿을 수 있고, 그래야 정말 믿음 있는 자로 살 수 있다.

 

믿음에 즉시로 어떤 대가가 따르고, 어떤 심판이 있다면 믿음이 신앙이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오늘 같이 대가는커녕 고난이 주어질 수도 있다.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 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

 

역시 안 썩은 곳이 없다. 누군가는 이 의로운 행위를 지지해 주고, 말렸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누구도 아합과 이세벨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다. 아니 누구보다 신실한 나봇을 구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요즘이라고 다를까?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살았고, 교회에서 삶을 보냈다. 그러다 교회 밖으로 나와 살기 시작했다.

 

어느 곳이 더 은혜 충만하고, 더 말씀대로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길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다.

 

교회는 매번 똑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새벽부터 수요, 금요, 주일을 보낸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있음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불을 환하게 켜고, 그 큰 예배당에 20~30명의 사람들만 앉아서 예배드린다.

 

길거리에는 단돈 만원이 없어 쓰러져가는 미혼모들과 혼자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어찌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이 있음에도 교회 건축을 위해 돈을 몇십억씩 쌓아두고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누구나 다 똑같이 산다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

 

아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정말 정신차려야 한다.

 

주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이 원하시는 바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고, 그것이 공의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오늘 이러한 은혜가 우리 신앙 가운데 다시 한번 정립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영광이 없다 할지라도, 잠깐의 고난이 뒤따른다 하여도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선한 양심이 우리 삶을 지배하기를, 우리 삶을 이끌어가기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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