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 큐티(Q.T)

(왕상 7:27~39)참 귀하다(매일성경큐티, 열왕기상 7:27-39)

by 무지개소년 2023. 9. 18.

참 귀하다 

매일성경큐티 230918 월
찬양: 복음 들고 산을(유튜브 찬양링크)
성경: 열왕기상 7:27~39
27 또 놋으로 받침 수레 열을 만들었으니 매 받침 수레의 길이가 네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요 높이가 세 규빗이라
28 그 받침 수레의 구조는 이러하니 사면 옆 가장자리 가운데에는 판이 있고
29 가장자리 가운데 판에는 사자와 소와 그룹들이 있고 또 가장자리 위에는 놓는 자리가 있고 사자와 소 아래에는 화환 모양이 있으며
30 그 받침 수레에 각각 네 놋바퀴와 놋축이 있고 받침 수레 네 발 밑에는 어깨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어깨 같은 것은 물두멍 아래쪽에 부어 만들었고 화환은 각각 그 옆에 있으며
31 그 받침 수레 위로 들이켜 높이가 한 규빗 되게 내민 것이 있고 그 면은 직경 한 규빗 반 되게 반원형으로 우묵하며 그 나머지 면에는 아로새긴 것이 있으며 그 내민 판들은 네모지고 둥글지 아니하며
32 네 바퀴는 옆판 밑에 있고 바퀴 축은 받침 수레에 연결되었는데 바퀴의 높이는 각각 한 규빗 반이며
33 그 바퀴의 구조는 병거 바퀴의 구조 같은데 그 축과 테와 살과 통이 다 부어 만든 것이며
34 받침 수레 네 모퉁이에 어깨 같은 것 넷이 있는데 그 어깨는 받침 수레와 연결되었고
35 받침 수레 위에 둥근 테두리가 있는데 높이가 반 규빗이요 또 받침 수레 위의 버팀대와 옆판들이 받침 수레와 연결되었고
36 버팀대 판과 옆판에는 각각 빈 곳을 따라 그룹들과 사자와 종려나무를 아로새겼고 또 그 둘레에 화환 모양이 있더라
37 이와 같이 받침 수레 열 개를 만들었는데 그 부어 만든 법과 크기와 양식을 다 동일하게 만들었더라
38 또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각각 사십 밧을 담게 하였으며 매 물두멍의 직경은 네 규빗이라 열 받침 수레 위에 각각 물두멍이 하나씩이더라
39 그 받침 수레 다섯은 성전 오른쪽에 두었고 다섯은 성전 왼쪽에 두었고 성전 오른쪽 동남쪽에는 그 바다를 두었더라

 

 

38 또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각각 사십 밧을 담게 하였으며 매 물두멍의 직경은 네 규빗이라 열 받침 수레 위에 각각 물두멍이 하나씩이더라
39 그 받침 수레 다섯은 성전 오른쪽에 두었고 다섯은 성전 왼쪽에 두었고 성전 오른쪽 동남쪽에는 그 바다를 두었더라

 

무엇을 만든 것일까?

 

일단 27~37절까지는 '놋 받침 수레' 열개를 만든 것이고, 38절은 '물두멍' 열개를 놋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물두멍을 놋 받침 수레에 올려, 다섯 개는 성전 왼쪽에, 다섯 개는 성전 오른쪽에 두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물두멍을 만든  것에 대해서는 고작 한 절을 할애한 반면, 물두멍을 받칠 받침 수레를 만드는 데는 무려 열 한절을 썼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두멍'보다 '받침 수레'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다음은 두란노 비전성경사전에 나온 내용을 참고한 내용이다.

 

물두멍: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데 사용했던 기구이다.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 즉 청동(놋)으로 만들었으며(출 38:8), 성소의 입구와 번제단의 중간에 놓였다(출 30:18, 28, 31).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물두멍에 와서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출 30:20-21). 물두멍은 더러움을 씻어서 정결하게 되어야 함을 상징한다. 솔로몬 성전에는 북쪽과 남쪽에 각각 5개씩 10개의 물두멍이 있었는데 성전의 물두멍은 제물을 씻는 데 사용되었다(왕상 7:30, 38, 43). 이때 제사장들의 몸은 대야를 따로 만들어서 씻었다(대하 4: 6).

 

물두멍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다. 참 중요한 기물이자, 도구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놋 받침 수레'에 관하여는 '성경비전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다른 곳을 찾아보았으나 사실 그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누가 봐도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물두멍'이 아니라 '놋 받침 수레'이다.

 

그런데 왜 '물두멍'은 어느 곳에서나 정의를 찾을 수 있게 한 반면, 놋받침 수레는 정의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

 

맞다. 오늘 본문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용 용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두멍'이지, '받침 수레'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받침 수레'는 '물두멍'을 올려놓기 위해 제작된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무려 11절의 분량을 다른 것이 아닌 '받침'에 투자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두멍'은 '정결', '순결'의 도구이다. 즉 제사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또 '정결'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개수도 한 개만 만든 것이 아니라, 무려 10개나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정결'의 도구를 받치는 받침 수레에는 어떤 용도가 있었을까? 

 

 

놋받침수레와물두멍

 

바로 이런 모양이다. 그렇다. 놋받침수레가 있으면 성전 안에서 어디든 이동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어느 곳에서나 '정결함'이 중요했고, 10개나 되는 물두멍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어디든 '물두멍'이 커버할 수 없는 곳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물두멍'도 중요했지만, '놋 받침 수레' 또한 성전 제사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물두멍'과 '놋 받침 수레'는 무엇과 같을까?

 

'물두멍'을 보다가 '예수님'을 생각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겼다. 정결케 되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님으로 인한 정결함, 죄 씻음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계만방 곳곳을 다닐 자들이 필요했다.

 

바로 '우리'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모진 핍박과 조롱을 뛰어넘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중요한 것이다.

 

오늘 그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누구 하나 중요치 않은 자가 없다. 우리는 모두 '놋 받침 수레'이다. 모두 엄청난 정성을 들여, 엄청난 은사와 재능으로 하나님이 빚으신 하나님 나라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누구나 귀하게 쓰임 받을 자들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와 성도들이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명 목사들만 귀하게 쓰임 받는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언변이 있는 사람만 뛰어난 은사와 재능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뭔가 모자라고, 재능 없어 그 길에 있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비웃는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비웃음과 조롱을 향하여 경고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귀하게 쓰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성전 의자에 두리번거리며 앉아있는 사람이나,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나 모두 예수님을 받치는 귀한 수레이다.

 

성전의 허드렛일이나 바닥 청소를 하는 사람이나, 예배를 총기획하고, 주도하는 사람이나 모두 예수님의 귀한 받침 수레이다.

 

그러므로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 쓰임 받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 도가 넘쳐 예수님보다 내가 높아지려 할 때에는, 사람들 앞에서 영광 받고 싶을 때에는,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다시금 '놋 수레 받침'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는 '겸손함'이 있기를 또한 소망한다. 샬롬!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댓글